중세시대 비잔틴, 로마네스크, 고딕 건축물

중세시대 기독교가 더해진 비잔틴 문화

과거 로마는 1000년에 걸친 지배를 하면서 광대한 영토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으나, 분열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분열된 로마를 재통일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권력의 기반을 다지기 위한 자신만의 세력을 찾기 시작한다. 그 와중에 지하에 숨은 거대 세력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이들은 바로 당시 격렬하게 탄압받았던 기독교인들이었다. 기독교인들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놀라운 집중력을 보여주었고, 그들이 원하는 것은 자유로운 종요활동의 보장뿐이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약속한 대신 큰 지지를 얻을수 있게 되었고, 새로운 세력의 도움으로 로마 제국을 재건할수 있었다. 최강의 권력을 가졌던 로마 황제는 이에 걸맞는 절대적인 힘이 필요한 상황에서 기독교의 등장은 흩어진 힘을 응집할수 있는 계기가 된것이다.

다음으로 황제는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옮기면서 이곳을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부르게 된것이다. 바로 이시점부터 고대의 전통에 기독교적 요소가 더해진 비잔틴 문화가 시작된 배경이 된다. 이과정에서 새롭게 등장한 것은 교회와 순례자였다. 모든 건축물과 예술 작품에 성경의 내용이 묘사되었고, 순례자를 위한 건축시설이 등작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종교적 사회적 경향은 건축물의 평면도에도 나타나 있다. 로마 건축의 평면도와 비잔틴 건축의 평면도를 비교해보면, 그 차이를 확연히 알수 있는데, 로마는 일정하고 질서정연하며 우주적인 방휘체계를 갖고 있었다. 공간은 언제나 통로 개념으로 표현하려 노력했으며, 바실리카도 본래 기능에 따른 순수한 형태이다.

중세 고대 전통에 더해진 비잔틴 문화

그러나 비잔티움에 와서 바실리카는 더 외향적인 형태를 띄기 시작하는데, 유럽과 아시아의 만남이라는 지역적인 요인도 작용했지만 가장 큰 요인은 종교였다. 곧 신의 영역 제단과 인간의 영역 입구, 이 두 공간을 연결하는 길고 좁은 길은 신성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비잔티움의 공간은 인간의 공간이 아닌 복잡한 공강느로 변형되었고, 로마와 비잔티움 사이에 있었던 초기 기독교 건축의 평면과 비교하면 더 잘 파악할수 있다.

*바실리카 : 로마 시대 법정이나 상업거래소등에서 사용된 공공건축물. 교회건축 형식의 기조로 로마네스크와 고딕적 성당 건축에 영향을 미쳤다. 과거 대부분 평면은 바실리카처럼 직사각형 형태였지만 이것이 서양 건축 평면의 시초다.

 

로마풍을 중세식으로 재현한 로마네스크

로마에 의해 억압당한 기독교는 중세 문화의 본바탕이 된다. 신의 존재는 절대적이었지만 인간에게 좀더 실질적인 존재가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유럽 교회 중에는 지하에 성인의 유해나 물건을 보관하고 있는 곳이 여럿 있는데, 이것을 로마네스크의 출발점으로 보고 있다. 이 로마네스크는 로마풍을 따른다는 의미로 반원과 로마식 아치를 사용한 건축양식이다.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정치를 대신한 것이 바로 교황의 역할이었다. 언제 전쟁이 일어날지 모르는 불안정한 정치는 강력한 중앙집권체계가 필요했고, 이를 교황을 중심으로 정신의 중앙집권화가 만들어지게 된것이다.

이시기 정치적 불안 속에서 각 국가들은 각자의 방어 수단을 구축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울타리가 세워지고 첨탑을 세워 경계를 표시하기도 하였다. 이런 수평적인 울타리와 수직적인 첨탑의 조합이 바로 로마네스크의 가장 특징이다. 이전의 건물들보다 더 많은 첨답이 건물 외벽에 건설되었는데, 이는 성벽으로서 울타리의 기능을 보강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로마네스크 건축물은 반복적인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로마네스크 건축물은 창문보다 기둥이나 아치를 주로 사용했고, 특히 볼트 기법으로 다양한 천장 조직을 표현했으며, 벽 깊숙이 들어간 공간이 신비로운 내부를 연출하기도 한다. 즉 공간의 연결, 아치와 볼트, 기둥의 모양으로 로마 시대의 모습을 재현한 것이다. 다만 다른점이 있다면, 로마는 당시 위인들을 현실적으로 동상과 조각으로 표현했는데, 로마네스크는 상징적인 종교적 표현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첨답형 아치로 신앙심을 표현한 고딕 양식

로마네스크 양식이 안정화되면서 고딕양식이 발전하게 되었다. 고딕은 선으로 만들어진 건축물이다. 이전의 강한 이미지에서 벗어나 주변과의 융합을 꾀한 고딕양식은 형태를 해체하는데 오히려 선을 사용했다. 돌로 만들어진 건축이 맞나 싶을 정도로 형태를 조각적이고 섬세하게 분해하고 개방해 조화를 이루려 노력했다. 건축물의 입구만 봐도 고딕 양식이 얼마나 도시에 친근감을 주려했는지 잘 알수 있다.

이런 고딕이 주변환경과의 조화를 꾀하게 된 이유는 로마네스크의 순례자의 길과 연관이 높다. 이 길이 도시를 형성하는 역할을 하였고, 도시의 각 요소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것이다. 노르베르그 슐츠는 중세도시를 “성벽은 단단한 껍질이고, 교회는 정교학 핵”이란 표현을 했다. 이것은 뚜렷한 형태는 오히려 주장하는 바가 인위적일수 있으니, 고딕은 그러한 구조를 탈피해 신비한 구조를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

고딕양식의 특징중 하나인 스테인드글라스는 활자가 일반화되지 않아 성경을 잘 보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성경내용을 알리고, 교회 내부를 종교적인 분위기로 만드는데 좋은 수단이 되었다. 두꺼운 벽으로 내부가 빛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로마네스크 건축물의 문제를 스테인드글라스가 해결해 준 셈이다. 따라서 고딕 양식 장인들은 벽 두께를 줄이는데 심혈을 기울었으며, 신앙의 상징인 첨탑의 존재로 불안한 벽의 하중을 ‘플라잉 버트레스’라는 새로운 구조물로 보안해 낸 것이다. 이는 더 높이 올라가고자 했던 고딕 시대의 상징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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